[미스터트롯 최후의 7人 인터뷰] 함께 웃고 울고 노래한 석 달 오늘 밤 왕관의 주인이 탄생한다

김호중 - "팬들이 지어준 별명 '트바로티'… 볼 때마다 설레서 웃어요"
김희재 - "동요 대신 트로트 부르고 자란 나에게, 노래는 곧 인생"
영탁 - "밑바닥까지 가본 인생, 노래는 다른 사람 아닌 나와의 싸움"
이찬원 - "25년 트로트 외길… 眞 된다면 상금은 대구·경북에 기부"
임영웅 - "꿈을 포기해야 하나 생각했을때… 미스터트롯이 날 구해줘"
장민호 - "人性에 대한 칭찬 많이 받아서, 이제 휴지도 못 버리겠어요"
정동원 - "귀엽다, 잘생겼다 해주는 삼촌·형아들 많이 생겨서 좋아요"





'트바로티' 김호중

독일 유학 후 '미스트롯'을 보면서 트로트라는 장르에 완전히 빠졌다. 나중에 알았는데 내가 미스터트롯 지원서 신청한 게 10번째 안이라더라. 공고 뜨자마자 달려갔으니까. 매일매일 신세계다. 형님들이 여기를 꺾고 여기는 빼고, 하면서 정말 많이 도와준다. 어린 시절 할머니 손에 자라면서 학교생활에 적응 못 했다. 그랬던 내게 손 내밀어 준 당시 김천예고 서수용 은사님이 아버지 같은 분이다. 처음엔 트로트 한다고 엄청 혼날 줄 알았는데 '멋지다'고 격려해주셨다. 팬들은 내게 '트바로티'란 별명도 붙여주셨다. 혼자 트바로티, 트바로티 하며 웃는다. 경연 중에 많은 형님과 동생을 만났는데, 동원이는 어린 시절 나와 비슷해 매일 '삼촌이 뭐 해줄까?' 묻는다. 어릴 때 엄마 아빠랑 패밀리 레스토랑 가서 빵 먹어보는 게 소원이었다. '희망가' 연습하면서 동원이랑 가로수길에서 킥보드 타다 "패밀리 레스토랑 갈까?" 물었더니 동원이가 안 좋아한대서 삼겹살 먹으러 갔다, 하하! 내 꿈은 삼시 세끼 먹고 싶은 반찬 먹는 거였다. 진은 꿈도 못 꾸지만, 만약 된다면 1억은 기부할 거다.



'울산 이미자' 김희재

가수는 아버지의 꿈이었다. 동요 대신 트로트를 부르고 자란 내게 노래는 곧 인생이다. 내 이름을 처음 알린 '꽃을 든 남자' 무대는 잊을 수 없다. 해군 복무 중이라 경연을 마치고 부대에 복귀했는데, 해군 수병들이 부모님과 자신의 이름으로 사인을 받아가 놀랐다. '사랑과 정열' 팀으로 봉 춤에 도전하면서 온몸에 피멍이 들고 살갗이 찢겼지만 무대를 아름답게 꾸밀 수 있었기에 아프지 않았다. 위로를 주는 가수가 되고 싶다. 준결승 전에 컨디션이 정말 안 좋았는데, 태주 형과 수찬 형이 빨리 나으라며 돌봐줬다. 어찌 보면 경쟁자일 텐데 진심을 다해 위로해주는 모습에서 정말 많이 배웠다. 든든한 동료들, 특히 해군의 지원과 배려가 있었기에 이 자리에 오르는 게 가능했다. 경연 준비를 위해 군악대원들이 일과 후 개인 시간을 할애해 연습을 도와주셨다. 정말 감사하다. 모두가 고생했고, 누구 하나 진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한다.




'리듬탁' 영탁

미스터트롯 경연 동안 내가 하고픈 이야기를 했고 후회 없이 놀았다. '사내'를 통해 긴가민가하면서 나 믿고 여기까지 온 것과, '막걸리 한잔'을 통해 뇌경색으로 쓰러진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보듬었다. 발라드, R&B 등 여러 도전을 해보고 실패하며 밑바닥까지 가봤다. 물 사 먹을 돈조차 없어서 친구들 전전하며 살아봤던 나다. 원래 내게 주어진 건 단 하나도 '없던 것'이라 경연에 대한 욕심도 없었다. 이런 대축제에 안 나오면 도망가는 것 아닌가. 노래는 나와의 도전이지 남들과의 싸움이 아니다. 데뷔 13년에 안 해본 노래 없지만 트로트에선 찬원이 성훈이 승민이 동원이가 나보다 한 수 위였다. 그들은 간주만 나와도 무슨 노래인지 안다. 경연 중 사인 1000장은 해 드린 것 같은데, 이런 신드롬에 들떠 있기보다는 자기 음악 잘하고 오래갈 수 있는 음악인이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1등? 나랑 민호 형은 후배들 받쳐주면 된다.

'찬또배기' 이찬원

내 인생에 어떤 상황이 닥쳐도, 어떤 이벤트가 펼쳐져도 미스터트롯이 준 그 이상의 의미를 주는 곳은 없을 것이다. 101인 예선 준비하란 말씀에 바로 휴학(영남대)하고 서울로 왔다.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나 스스로 '25년 트로트 외길'이라 표현했듯, 이런 무대가 만들어진 것만 해도 감사하고 그만큼 간절했다. '진또배기' 때는 '어헐수, 얼쑤, 헐얼쑤, 어허허헐쑤' 등 500번 넘게 하며 양지원 형님께 어떤 게 좋으냐고 조언을 구했다. 제일 신났던 건 '울긴 왜 울어'였는데, '우훌, 울, 후울'부터 시작해 '어차아아아아아아아피'처럼 늘리거나, 전조 등 작가님을 하루에도 수백 번 괴롭히며 편곡 바꿔달라고 졸랐던 기억이 난다. 학창 시절 유튜브에서 본 임영웅 장민호 형님들과 이번 경연으로 친해지니 어머니가 "너도 드디어 빛을 보는구나" 하셨다. 상금 1억? 당연히 대구 경북에 기부할 거다. 지금도 과분한데, 혹시 되면 실신할 거다.



'임히어로' 임영웅

버티고 살아남기 위해 시작한 트로트다. '말하는 듯 부른다'는 말을 제일 좋아하는데, 노래조차 포기해야 할 절망의 시간이 있었다. 그 순간 미스터트롯은 무너지지 말라고, 네 노래를 알아주는 사람이 분명 있다고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다. 처음엔 '1라운드만 통과하자'고 빌었다. 나도 현역이지만 트로트 잘하는 사람이 이렇게 많은 줄 몰랐다. 하루 10시간씩 연습했다. 강약 조절, 호흡 등 수만 개 조합 중에서 최적의 소리를 찾은 뒤 몸에 익을 때까지 연습했다. '임영웅은 왜 트로트를 안 해?'란 말씀에 상처받기도 했지만 충분히 보여 드릴 수 있다고 자신했다. 미스터트롯은 나의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 '극복'의 무대다. 어릴 때 다친 얼굴 흉터 때문에 표정 짓는 게 어려워 두려움이 컸다. 지금도 보통 사람처럼 웃으려면 다친 쪽에 힘을 더 많이 줘야 한다. 춤추는 것 역시 힘들었는데, 오르지 못할 산을 오른 듯한 성취감을 안겨줬다. 혹시라도 진이 된다면, 너무 울 것 같다. 아직 내가 꿈을 포기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트로트 BTS' 장민호

미스터트롯 초반 2주가 데뷔 23년이란 나의 음악 역사를 단숨에 이겨버렸다. 물론 데뷔 후 해체를 반복하며 제대로 활동한 건 4~5년 남짓이지만, 그간 길거리에서 날 알아보는 분이 없었다. 하지만 미스터트롯 2주 만에 동네 마트에서 "꺄아, 장민호다!"라며 여기저기서 사진 찍는 팬들을 만났다. 꿈꾸는 듯했다. 처음부터 생각지도 못한 주목을 받아서인지 내가 여기서 다 보여주지 않으면 죽겠다는 중압감이 컸다. 100% 쏟아내야 후회가 없다고 했는데 그럴수록 나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그냥 내 목소리를 내도 된다고, 내가 편안해야 보는 이도 좋다는 걸 미스터트롯을 통해 새삼 배웠다. 의상에서부터 목소리, 자세 등 걷어낼 건 걷어내고, 더할 건 더한 게 바로 '상사화' 무대다. 사실 트로트계에선 막내급인데, 여기선 맏형이라 책임감이 굉장히 컸다. 후배들이 잘 따라와 준 건데 '인성'에 대한 칭찬을 많이 해주셔서 앞으로 휴지 하나 못 버릴 것 같다, 하하! 우리끼린 '모두가 진이야'라고 농담 삼아 말한다. 누가 진이 되든 축하해 줄 것이다.



'하동 프린스' 정동원

그간 전화할 사람이 별로 없었는데, 미스터트롯 하면서 전화할 삼촌들, 형아들이 많이 생겨 좋다. 게다가 귀엽다, 잘생겼다 해준다. 무대 올라가면 눈빛이 달라진다 칭찬해주신다. 여기 와서 처음 화음 넣는 것도 배우고('패밀리가 떴다'), 신성 삼촌이 노래할 때 강약 조절, 그러니까 댄싱퀸의 '새침한 아가씨'를 '새췸한 아아가쒸~' 이런 식으로 하면 듣는 맛이 생긴다고 가르쳐줬다. '사랑은 눈물의 씨앗'에서 바로 써먹었다. 경연 중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셔서 많이 힘들었는데 49재도 지내며 많이 털어냈다. 노지훈 삼촌처럼 일찍 결혼해 행복하게 살고 싶은데, 좋은 차 좋은 집을 말하는 게 아니라, 내 미래의 자녀들에겐 내가 겪은 아픔을 안 겪게 하는 거다. 작년부터 소아암 재단에 기부하고 있는데 노래하면서 계속 기부하며 즐겁게 살 거다. 진이 될 리는 없지만 만약에 된다면, 눈물이 많이 날 것이다. 1만5000명 중 최고니까. 근데 현실적으로 진은 안 될 것 같다,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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