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
솔로 백현, EXO의 백현
작년에 제가 <더블유> 5월호 커버 촬영을 했죠. 엊그제 일 같은데. 그 화보로 어떤 피드백을 받았냐고요? 글쎄요. ‘쇄골이 예쁘다?’ 그때는 멤버들과 모든 일을 같이 하는 생활에서 벗어나 혼자 화보 촬영도 하는 등 여러 일을 홀로 감당하는 기분이 들 때였어요. 이제는 솔로 앨범 두 장을 낸 상태고, 머지않아 세 번째 앨범도 낼 예정이라 적응이 좀 됐어요. 오늘 화보 촬영장에서 텐션이 더 좋았던 이유는 버버리 관계자분들 때문이기도 해요. 성품이 다들 좋으세요. 저도 누군가와 일을 하거나 후배를 대할 때 그렇게 웃으면서 좋은 기운을 주는 사람이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맞아요, 저 작년에 한가하지 않았어요. 진짜 바빴어요. 예정된 활동을 다 못하고 팬들을 만나지도 못하는 게 저만의 상황은 아니었잖아요. 이 세상 나 혼자 힘든 것처럼 굴기보다 어떻게든 상황을 이겨낼 수 있지 않을까 해서 몸을 더 바삐 움직였죠. 드라마 OST를 네 곡이나 부른 것도 그렇게 제 목소리를 들려줄 수 있다고 생각해서였어요. 여러분이 집에서 드라마를 보고 넷플릭스를 볼 때도 제가 곁에 함께 있는 것처럼. 두 번째 미니 앨범 <Delight>가 100만 장 판매를 돌파했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는 일단 믿기지 않았어요. 서태지 선배님 이후 솔로로도, 그룹으로도 100만 장 돌파는 처음이라는 말을 듣고 나니까 확 와닿더라고요. 너무 고마우면서, 자신감이 생겼어요. 네? 물론 원래 제가 자신감 넘치는 사람이긴 하죠. 하지만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냥 백현 정도에서 멈춰버리면 그 때부터 자신감을 잃을 거라는 사실을 전 알아요. 처음에는 ‘Candy’라는 곡에 대해 반신반의했어요. 이게 될까? 그저 그런 곡이라고 들어주지 않을까? 투어를 못해서 개인 시간이 좀 더 생긴 틈에 저, 연습을 정말 많이 했거든요. 보컬로서의 역량에 스스로 좀 더 믿음이 생겼을 때 ‘너 잘하고 있어, 이대로 하면서 더 열심히만 하면 돼’라고 생각하게끔 해준 게 <Delight> 앨범이에요.
EXO 멤버들과의 단체 채팅방에서 작년에 어떤 얘기가 제일 많이 등장했냐면요. 콘서트하고 싶다, 우리들 같이 있을 때가 가장 좋았다, 보고 싶다…. EXO 무대에 대한 그리움이 커져서 우리 콘서트 영상을 많이 봤어요. 왜 멤버들이 공연 때 그런 말 하잖아요, 이 무대는 팬들이 있어서 완성된 거라고. 제가 이번에 콘서트 영상을 계속 봤더니 그 말이 비로소 ‘정립’이 되더라고요. 우리 무대를 한 발짝 떨어져서 바라보니 팬과 우리의 합이 보였어요. 그리움이 열정으로 바뀌었죠. 1월 초엔 제 첫 단독 콘서트를 온라인으로 했어요. 보통 콘서트를 할 때 중반부가 지나면 체력적으로 힘들어서 라이브와 춤을 같이 소화하는 데 한계점이 한 번은 오거든요? 그걸 이겨내고 다시 한번 에너지가 치고 올라가도록 각성시키는 게 환호성이에요. 온라인으로 공연 진행을 하면 다른 장점도 있기는 하지만, 텐션이 어느 순간 확 치고 올라가는 게 아니라 계속 중간대에 머물러 있는 느낌이더라고요. EXO가 데뷔한 지 10년이 다 되었으니까 이제 음악적으로 또 어떤 길을 가야 하는지에 대한 얘기도 자주 하죠. 그런 얘길 할 때면 아무래도 작곡에 관심 있고 음악을 두루 듣는 찬열이나 디오가 말을 많이 해요. 카이와 세훈이를 생각하면 너무 좋은 게, 특히 세훈이는 EXO 초기에는 음악적인 의견을 많이 내지 않았거든요. 어느 순간 얘도 이렇게 저렇게 아이디어를 내고 어떤 음악을 들려주기도 하고 견해가 생겼어요. 그런 모습을 보면 아 확실히 시간이 흘렀구나, 멤버들이 가수에 대한 애착이 더 깊어졌구나 느껴요. 시간이 더 흘러도 멤버들은 여전히 착하고 순할 것 같아요. 시상식 같은 데 나가서도 허세 없이 옛날과 비슷한 느낌으로 앉아 있고 그런 모습이 그냥 그려져요.
chapter 2.
오래 가는 음악
평생 해도 못 이겨요. 평생을 해도 정복할 수 없고 수수께끼만 남는 것. 음악이 그래요, 저한테는. 유행이라는 게 언제 어디서 어떻게 터질지도 모르고, 그 흐름을 사람이 온전히 읽어낼 수는 없어요. 코드가 아주 단조로운데 잘되는 음악, 복잡하고 화려한데 잘 안 되는 음악. 불협화음 같은 면이 있는데 잘되는 음악, 음악적으로 완벽해서 ‘아 이 곡 정말 잘 만들었다’ 싶은데도 전혀 안 터지는 음악이 있죠. 평생을 매달려도 정복할 수 없는 대상이라니까요? 저도 한때는 유행하는 거 하고 싶었어요. 시대 흐름을 타고 싶고, 그 흐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2019년에 낸 첫 번째 솔로 앨범 <City Lights>의 타이틀곡 ‘UN Village’를 녹음하고 나서 이수만 선생님이 그랬어요. “너 10년, 20년 뒤에도 네 노래 듣고 싶으면 이거 다시 좀 고쳐야 해.” 제가 그랬죠. 이게 요즘 감성이고, 이런 식으로 부르는 게 사람들이 받아들이기에 더 ‘Easy’할 것 같다고. 선생님은 제가 좋으면 뭐 그대로 가도 되지만, 어쨌든 오래 음악 일을 해온 사람으로서 세월이 흘러도 들을 수 있는 노래들은 따로 있다고 하셨어요. 백현이 그런 것을 남겼으면 한다고요. 생각 끝에 선생님 조언 따라 바꿔서 녹음했어요. 네? 그런 게 있어요. 예를 들면 멜로디의 음이 어떻게 끝나는지, 작곡과 멜로디로는 손색이 없어도 보컬이 끝음 처리를 어떻게 하는 게 더 나은지. 그런 방식에 따라 음악적 완성도가 달라지는 게 확실히 있거든요. 제가 나중에 무슨 생각을 했냐면, ‘어른들 말씀 틀린 게 없다’(웃음). 선생님과 대화해보면 그분은 현재를 살고 계시지 않아요. 이미 저만치 앞에 가 계세요.
음악적 완성도가 부족하더라도 잘될 만한 곡을 만들자고 하면 인기도 기쁨도 잠깐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완성도 있는 음악을 만들면 누가 언제 들어도 귀에 거슬리지 않고 완벽할 수 있어요. 저는 음악 산업에 종사하지 않는 일반 대중도 음악이라는 것에 계속 노출되고 그게 쌓이면 무의식적으로 감각이 레벨업된다고 보거든요. 음악을 매일 들으면 귀가 열리기 시작해요. 안 들리던 베이스 소리, 킥 소리 같은 게 어느 순간 들리고. 그러니까 갈수록 수준이 높아지는 대중과 팬의 귀를 사로잡으려면 애초부터 다른 무엇보다 완성도를 염두에 둬야 생명력이 ‘오래 가는 노래’가 나올 것 같아요.
제가 보컬 방식의 근본적인 변화를 시도한 지 딱 2년 됐네요. 좀 더 구체적으로요? 음. 소리에는 음역대가 있잖아요. 흔히 말하는 가성, 진성, 두성 등이 있고요. 그 사이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도록 훈련하는 거죠. 흉성부터 두성까지 한 톤으로 쭉 갈 수 있게끔. ‘김나박이’라고 하죠. 김범수, 박효신 선배님… 그분들이 내는 소리를 들으면 음에 따라 톤이 얇아지거나 두꺼워지는 게 아니라 저음부터 고음까지 하나예요. 소리가 울리는 위치만 다를 뿐이지. 음의 변화에도 위태위태한 느낌 없이 쭉 미끄러지듯 이어가는 안정감을 갖기 위해서 노력하는 거죠. 남자와 여자, 목소리의 얇기나 높낮이 차이가 있잖아요. 서문탁 선배님은 웬만한 남자보다 파워가 강하고, 베이스가 강해요. 뭐랄까. 저도 그렇게 ‘지지 않는 느낌’을 갖고 싶어요. 나이가 들어도 날것의 느낌이 있었으면 해요. 포장지에 싸여 있지 않고 그냥 날것으로 나서도 믿고 들을 수 있는 사람. 아주 핫한 상품을 생각해 보세요. 시간이 지나면 단점이 하나씩 드러나고 거품이 빠지면서 원래 그 상품의 값어치로 돌아가잖아요. 예전에 저는 제가 그런 식으로 될까 봐 두렵기도 했어요. EXO로 인기가 많지만, 사실 나는 노래를 그렇게 잘하는 사람이 아닌데 어떡하지? 팬들의 기대치는 이만큼 큰데 기대에 못 미치면 어떡하지? 그래서 나름의 연구와 공부를 오래 했어요.
chapter 3.
서른 그리고 버킷리스트
제 약점요? 귀차니즘. 예전에 팬들이 ‘오빠 저 양치하기 싫어요’라고 남긴 댓글을 봤어요. 제가 그랬죠, 지금 바로 일어나서 양치를 한번 해봐라, 그럼 나 자신을 이긴 것 같아서 기분이 좋을 것이다. 저는 늘 그렇게 살아요. 귀차니즘 때문에 저 자신과 싸워야 해요(웃음). 게으른 사람 치고 솔로 앨범을 자주 낸다고요? 재밌는 점이 있는데요, 제가 게으르기 때문에 어떤 행동을 안 하잖아요? 그럼 딱 3분 정도만 좋고 편해요. 그런데 그 뒤로는 계속 그 생각이 나요… 그래서 그냥 해야 해요. 날씨 추우면 집에서 연습실 오가는 것도 귀찮고 싫을 때가 있단 말이에요. 일단 밖으로 나가요. 그럼 연습 마치고 집으로 향할 때 쯤에 ‘그래도 오늘 알차게 살았다’ 싶어서 기분이 좋아져요. 대신 집 밖에 나갈 일이 있으면 한 번에 볼일을 다 처리할 수 있도록 스케줄을 짜요. 집에 들어갔다가 다시 나가는 건 절대 안 될 일이지.
서른이 됐어요. 장르에 국한되지 않고 더 여러 가지를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대감이 생겨요. 왜 어른 돼서 나 어릴 때 찍어놓은 비디오 보면 뿌듯하고 좋잖아요. 20대의 나, 30대의 나, 40대의 또 다른 나… 나이 들어서 뒤를 돌아봤을 때 내 활동과 모습이 어떻게 변해왔는지 일대기를 보는 거 말이에요. 해보고 싶은 거요? 많아요. 영화나 드라마만 봐도 ‘우와, 저거 내 뮤비에서 시도해볼 만한데?’ 하는 것도 많고요. 제가 어느 순간 미래 지향적인 것보다 향수에 관심이 생겼거든요. 2G 폰 쓰면서 문자 두드리고, 친구와 MP3 플레이어 교환해서 서로의 음악 취향을 알아보고, 그런 소중함이 점점 살아지는 것 같아서요. 옛것을 다시 찾다 보니 요즘과 다른 드라마타이즈 식 뮤비에 끌려요. 임창정 선배님의 ‘소주 한 잔’ 뮤비를 보면, 노래 가사와 그리 연관성이 없는 드라마로 구성돼 있어요. 그죠! 저도 요즘에 그런 걸 하면 신선할 것 같아서 해보고 싶었어요! 그런데 그걸 최근에 윤호 형이 먼저 했다니까요! 형한테도 말했어요, 형, 나 그런 드라마 정말 시도하고 싶었다고. 뮤비 안에서 가수가 그저 멋지게 등장하는 것 말고 드라마 영상에 노래가 흐르는 것만으로도 ‘어? 이 노래 왜 이렇게 슬퍼?’ 할 수 있잖아요. 한 편의 전쟁 영화가 있는데, 거기에 흐르는 곡은 조성모 선배님의 ‘To Heaven’인 식으로요. ‘나 가거든’과 <명성황후>의 조합도 좋더라고요. 드라마에 집중하게 하면서, 음악의 감성 조성에 더욱 도움을 주기도 하는 뮤비. 그런 거 해보면 재밌을 거 같지 않아요? 제 버킷리스트에 있습니다
아마추어 게임 대회에도 나가보고 싶어요. 게이머를 ‘부캐’ 삼으면 어떨까? 인터넷에 이런 말이 돌더라고요. ‘롤 좋아하는 남자 만나지 마라.’ 근데요, 밖에서 술 마시고 돌아다니는 것보다 실내에서 게임을 하는 게 훨씬 건전하지 않아요? 게임을 하면 재미는 재미대로 있으면서 그 게임을 매개로 친구들과 협동심을 기를 수도 있거든요. 같은 목표를 가진 이들끼리 팀워크를 다지는 일인데 심지어 리스크도 거의 없는 간단한 일이에요. 친구들이랑 사업을 벌이겠다는 것도 아니고, 같이 게임 하다가 이기면 좋고, 지면 ‘한 번 더 하자’ 하는 거고. 게임만의 열정과 스포츠맨십이 있다고요. e스포츠가 괜히 아시안 게임에 정식 종목으로 채택됐겠어요? 이제 그만 최후 발언을 하라고요? 네. 해보지 않았던 시도를 해나가는 게 30대의 제 모습이면 좋겠어요. 30대가 됐다고 하면 누구는 “벌써 그렇게 됐어?” 하고, 또 누구는 “아직 멀었네” 하죠. 저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싶어요. 앞으로 제 실력 관리뿐 아니라 몸 관리도 신경 쓰면서 오래오래 노래할 수 있는 사람으로 남을 거예요. 30대의 저, 백현을 기대해주세요.